미국의 대 테러전쟁을 위한 외교 전개
미국은 테러 발생 이후 중동 이슬람 국가와 중앙아시아 국가를 중심으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 이스라엘의 반발을 예상하면서까지 아랍권에 유화외교를 펼침. 특히 이른바 불량 국가로 지목한 이란, 수단, 쿠바 등에도 협력을 요청.
미국의 대 테러전에 대
공군기지로 이동하는 가운데 미 대통령으로서 실질적인 권한 행사에 빈틈없이 이루어졌으며, 부시 대통령은 미국민과 전세계에 대해 “테러공격에 대한 보복 의지와 국제사회의 요청”등을 직접언론에 발표하고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전시치제>로 돌입한 것이다. 9.11테러가 지난 역사속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같은 해 10월 7일부터 시작된 미군과 영국군의 합동 공격으로 인해 대부분의 공군기지와 지휘본부, 방공망과 방송시설이 파괴되었음에도 여전히 빈 라덴을 인도하지 않고, 계속 항쟁 의지를 밝히면서 성전(聖戰: 지하드)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2001년 11월 탈레반 정권이 무너지고 여
미국은 바그다드를 완전 장악하였다. 이로써 전면전은 막을 내리고, 4월 14일에는 미군이 이라크의 최후 보루이자 후세인의 고향인 북부 티크리트 중심부로 진입함으로써 발발 26일 만에 전쟁은 사실상 끝이 났다.
동원된 병력은 총 30만 명이며, 이 가운데 12만 5000여 명이 이라크 영토에서 직접 작전에
탈레반 정권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개시하면서 아프간전쟁은 시작된다.
미국의 아프간전쟁 준비
9.11테러 직후 미국 지도부는 테러범과 비호세력을 구분하지 않고, 즉각적인 대규모 공격으로 테러를 원천적으로 뿌리 뽑겠다는 강경책을 대 테러 보복 전략을 내놓았다. 9월 13일 부시대통령은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미국의 제1의 보복 대상이었으며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체제변환을 시도하게 된다. 2001년 10월에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 미국은 그 해 12월에 탈레반세력을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며 임시정부를 거쳐 2004년 12월에는 아프간 역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
공군 수송단 지원과 아울러 5억불에 이르는 전쟁비용을 지원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인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 파병시기가 늦었기 때문에 10년간 사우디아라비아 건설수주에서 실질적으로 배제되는 등 경제적 불이익을 받았었다. 즉, 이라크전의 전후 복구에 참여할 지분은 이라크
전쟁』, 이지북, 287~289면
이처럼 아프가니스탄은 마약의 주요 생산국인데 당장 마약의 원료재배를 금지할 경우 국민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큰 문제가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탈레반 등 이슬람근본주의 세력들이 마약을 무기 구입 등의 군사 활동을 위한 자금으로 사용한다는 데 있다.
미국 무기 구매, 아프가니스탄 반테러전쟁 기여, 국제평화유지군 파병, 한국의 PSI 공식가입 문제가 한미동맹 현안으로 계속 부각될 것이다.
이와 같은 신 한미동맹은 미국의 세계팽창주의로 귀속될 것이다. 한국은 미국의 세계진출의 교두보내지는 출격기지로서 종속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테러로 인해 90여 개국 3,500여 명의 무고한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 미국 건국 이래 본토의 중심부가 외부의 공격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이에 부시(George Walker Bush) 전미대통령은 9월 12일 테러 개입자들에 대해 사전 경고 없이 보복할 것을 천명하고, 이튿날 '이 테러를 21세기 첫 전쟁'으로 규정하였다.